경쟁사 해킹 틈탄 코인원…동업자 딜레마와 부메랑 [취재여담]
[홍범식 LG유플러스 CEO(사진=LG유플러스)]
"SK텔레콤만의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해 4월 SK텔레콤에서 유심 정보 해킹 사고가 발생하자 홍범식 LG유플러스 사장이 임원들에게 당부한 말입니다. 경쟁사의 사고를 영업 기회로 활용하지 말라는 지시도 내렸습니다.
당시 SK텔레콤을 떠나는 가입자를 확보하는 것은 경쟁 통신사들에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홍 사장은 고객 유치보다 이용자 불안 해소를 우선했습니다. 유심 부족을 겪던 SK텔레콤에 자사 발주 물량을 먼저 공급하겠다는 제안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KT 역시 일선 유통망에 불건전한 마케팅을 자제하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일부 판매점에는 '해킹으로부터 안전한 KT로 오세요'라는 문구가 내걸렸습니다. KT 공식 홈페이지에도 '안전하게 KT로 번호이동하세요'라는 광고가 등장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지난해 9월, KT에서도 개인정보 유출과 무단 소액결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쟁사의 사고를 계기로 내세웠던 안전성 홍보가 결국 자사에도 되돌아올 수 있는 부메랑이 된 셈입니다.
결국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경쟁사의 해킹 사고를 이용한 불안 조장 마케팅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KT의 허위·기만 광고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조사에 착수했고, 올해 9월 시정조치안을 전달하는 등 제재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해킹 직후 등장한 '안전한 코인원으로'
최근 가상자산업계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원은 지난 29일 '안전한 코인원으로! 최대 8만원 상당 혜택 드려요'라는 제목의 이벤트를 공개했습니다. 자물쇠 이미지와 함께 '단 8일, 지금 거래소 옮기면 혜택 받아요'라는 문구를 내걸었습니다. 다른 국내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을 1천만원 이상 순입금하고 1천만원 이상 거래하면 3만 포인트를 지급하는 등 최대 8만원 상당의 혜택을 제공하는 행사입니다.
공교롭게 하루 전인 28일에는 경쟁 거래소 빗썸의 사내 그룹웨어 해킹 사고가 알려졌습니다. 이후 조사에서 고객 844명의 주민등록번호와 신분증 사본 등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경쟁사의 해킹 사고가 알려진 직후 '안전'을 강조하며 다른 거래소로부터의 자산 이전을 권유하는 광고가 등장한 겁니다.
화이트해커 출신 차명훈 대표가 설립한 코인원은 이전부터 보안 무사고 기록과 정보보호 역량을 주요 경쟁력으로 내세워 왔습니다. 지난 2023년에는 가상자산사업자 최초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는 '정보보호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거래소 이용자를 유치하기 위한 환승지원금 행사 역시 지난해부터 이어온 마케팅 전략입니다. 코인원 관계자는 "수수료 무료화 이후 적극적으로 고객을 유치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며 "이번 이벤트도 그 일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경쟁사의 보안 사고 직후 안전성을 앞세운 마케팅이 가상자산 거래소 전반에 대한 이용자들의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가상자산업계 관계자는 "업계가 같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상황을 이용하는 게 아쉽다"며 "'타사는 문제 있지만 당사는 문제없다'는 방식으로 대응하면 업계 전체 신뢰도의 문제로 불거진다"고 우려했습니다.
다른 금융업권에서도 해킹 사고와 관련한 마케팅에는 신중한 분위기입니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다고 보안 경쟁력을 내세우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빗썸과 프라뱅에 이어 세계 최대 거래소 바이낸스에서는 약 63억 달러 규모의 해킹 침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해킹 위험은 거래소의 규모나 시장 지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고객 유치 경쟁 넘어…업계 공동 대응의 과제
코인원은 지난 2024년 12월에도 업계 1위 업비트가 비트코인골드(BTG)의 거래지원 종료를 결정한 직후 해당 가상자산의 입금 이벤트를 시작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다른 거래소에서 비트코인골드를 옮겨오면 최대 111만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제공하는 행사였습니다.
업비트가 프로젝트의 투명성과 지속가능성 등을 문제 삼아 거래지원을 종료하기로 한 자산에 대해, 다른 거래소가 입금을 장려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당시 코인원은 '일반적인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듬해 1월 20일에는 추가 입금 이벤트까지 진행했지만, 불과 18일 뒤인 2월 7일 코인원 역시 비트코인골드를 거래유의종목으로 지정하고 입금을 중단했습니다.
거래지원 종료와 개인정보 유출은 서로 다른 사건입니다. 다만 경쟁 거래소에서 문제가 발생한 시점을 고객 유치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논점은 공통적입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2024년 7월 미국 사이버보안업체 크라우드스트라이크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오류로 전 세계적인 전산 장애가 발생하자, 경쟁업체들은 자사 제품의 안정성을 강조하며 고객 확보에 나섰습니다.
마이클 센토나스 크라우드스트라이크 사장은 경쟁사들이 사고를 계기로 고객의 불안을 자극하는 영업을 벌이고 있다며 비판했습니다. 어느 보안업체도 유사한 사고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주최한 공동 회의(출처=마이크로소프트)]
반면, 사고 이후 같은 해 9월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는 당사자인 크라우드스트라이크와 경쟁 보안업체들을 한자리에 모아 시스템 안정성과 복원력을 높이기 위한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참석 기업들은 보안 프로그램의 업데이트를 단계적으로 배포하는 방식과 사전 검증 절차, 장애 발생 시 복구 체계 등을 개선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당시 데이비드 웨스턴 마이크로소프트 부사장은 "우리는 경쟁자이지만 적은 아니다. 우리가 막아야 할 적은 따로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가상자산업계는 오랫동안 투기와 불신의 시선을 받아왔습니다. 이를 바꾸기 위해 거래소들은 보안 투자를 확대하고 내부통제와 이용자 보호 체계를 강화해 왔습니다.
지난 4월 코인원을 비롯한 5대 거래소와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DAXA)는 빗썸 오지급 사고를 계기로 사고 재발 방지와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한 공동 결의문을 발표했습니다. 자율규제 고도화와 내부통제 강화 등 업계 차원의 자정 노력도 약속했습니다.
경쟁사의 위기를 영업 기회로 삼을지, 함께 대응할지는 동업자로서 마주하는 딜레마입니다. 그 갈림길에서 누군가는 경쟁보다 협력을 택했습니다. 시장의 신뢰를 함께 회복하겠다던 공동 결의의 무게도 결국 이런 선택에서 드러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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