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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만 세우면 연구소?…치킨집보다 많다 ['절제'의 미학, '착한' 규제 리포트]

SBS Biz 정광윤
입력2025.11.12 17:44
수정2025.11.12 18:26

시장경제에서 규제는 참 말이 많은 화두입니다. 공정, 안전 등을 위한 장치지만,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무엇을 더 우선시 해야 할지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도 다양합니다. 규제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며 만들어지지만 시행한 뒤에는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정작 규제를 만드는 주체인 정부 내에 '규제개혁위원회'를 두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저희는 규제를 통해 발생한 '결과적인 상황'을 거꾸로 되짚어 보며, 의도했던 목적과 '기대했던 가치'를 가늠해 보고자 합니다. 규제가 의도했던 결과로 이어지는 '좋은' 규제도 있습니다. 이 또한 어떤 것인지?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의 시작과 접근은 이미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고민을 진행해 온 전문가들의 모임 '(사)좋은규제시민포럼'과 함께 합니다. 공동기획 : (사)좋은규제시민포럼

[앵커]

유용성을 다한 낡은 규제의 대안을 고민해 보는 연중 기획 시간입니다.

오늘(12일)은 우후죽순 생겨난 기업부설 연구소 문제입니다.

벤처기업과 연구개발 지원은 어느 정부에서든 성장동력으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제도가 마련돼 있고, '기업 부설 연구소' 역시 그중 하나인데요.

하지만 본래 취지와 달리 사무실에 벽 하나 세워 놓고 '연구소'라고 써 붙이면 세금 감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수단으로 변질된 게 현실입니다.

너도나도 설립에 나서다 보니 어느새 연구소 숫자가 전국 치킨집보다도 많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행정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을 정광윤 기자가 알아봤습니다.

[기자]

임대공간에 벽 세우고 방 만드는 데 쓴 돈만 2,500만 원.

관련 법에 따라 기업 연구소나 연구부서 설립을 인정받으려면 분리된 '연구 공간'이 필수입니다.

연구 전담 인원도 필요한데 이 업체는 대표 본인을 등록했습니다.

[박 모 씨 / A스타트업 대표 : (연구원 등록은) 그냥 형식적이죠. 연구와 개발 이런 게 다 사업에 녹아있는데 (연구만) 따로 분리해 내기도 쉽지 않고인력을 따로 빼서 전담을 오롯이 할 수 있는 기업 역량이 중소기업에 과연 되겠느냐…]

임대가 끝나면 설치한 벽을 다시 뜯어야 하는데 스타트업에겐 적지 않은 비용 부담입니다.

형식에 얽메인 규제라는 불만들이 많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부설연구소를 설치해야 세액공제와 정부 사업 가산점, 정책대출 우대 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 모 씨 / B스타트업 대표 : 기업 부설 연구소 인정을 못 받으면 각종 정부 지원 프로그램 거의 대부분에 아무런 지원조차 할 수가 없어요. 불만이지만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거예요. 연구소·직원분들 서로 셔플(뒤섞여)해서 일할 수도 있고 한데 그걸 물리적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거고요.]

심지어 컨설팅 업체도 생겨났는데 연구소 설립뿐 아니라 근거자료 작성, 사후 검증까지 문제없도록 도와준다고 말합니다.

[기업 부설 연구소 컨설팅 업체 : 연구를 특별히 하고 있지 않으니까 맡기시는데 연구원 몇 명이 들어가나 이거부터 정해줘야 해요. 한 명당 견적이 15만 원 정도 나가거든요. 그리고 매달 (연구 자료) 작성해서 저희가 보내드려요. 산업기술 진흥협회라고 가끔가다 실사를 다녀요. IT쪽 사람이 가서 보는 거 아니거든요. 이해를 못 하는데 그걸 검증할 수가 없죠. 걔네들이.]

이렇게 생겨난 기업부설연구소는 꾸준히 늘어 4만개를 넘어섰고 90% 이상이 중소기업입니다.

이들에게 돌아간 세액공제 혜택도 한 해에만 4조 5천억 원에 달합니다.

허울뿐인 연구소 설립에 나랏돈까지 새고 있는 겁니다.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올해부터 사전 현장 확인조사를 추진 중이라며 내년 2월 시행되는 기업부설연구소법에 따라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새 법안에 추가되는 내용은 이동형 벽 설치 허용과 과태료 차등부과 등인데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 7년 이내의 (기술창업) 기업은 비용의 몇 퍼센트를 R&D(연구개발) 비용으로 차라리 간주해야죠. 그래서 세액 공제를 해주라는 거죠. 어차피 그 기업들은 R&D를 안 하면 죽게 돼 있는 기업들이기 때문에…그렇게 하는 게 행정 절차도 간소해지고.]

정부 혜택을 받기 위해 급조된 연구소들이 전국의 치킨집 수를 넘어섰습니다.

중소기업들의 혁신 기술 개발을 장려한다는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벽 설치 같은 형식의 벽부터 개선이 필요해 보입니다.

SBS Biz 정광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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