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담] 삼성전자-한미반도체, 오랜 '악연' 풀고 악수할까
SBS Biz 조슬기
입력2025.10.23 11:27
수정2025.10.24 14:03
지난 22일 오후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개최된 국내 최대 '반도체대전(SEDEX) 2025' 전시장 한편에서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삼성전자와 한미반도체 경영진이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업계 관계자들과 취재진 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전시회 개막 첫날 오후 예정된 일정이었던 반도체대전 VIP 투어 당시 한미반도체 부스를 방문한 송재혁 삼성전자 최고기술책임자(CTO) 사장을 곽동신 한미반도체 회장이 반갑게 맞이하자 현장에 있던 기자들 사이에서는 곧바로 여러 말들이 오갔습니다.
'삼성이랑 한미 사이에 뭔가가 있나', '10년 묵은 앙금이 풀리는 건가' 등등 삼성과 한미가 연출한 훈훈한 분위기에 주목했습니다. 송 CTO는 곽 회장과 환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눈 후 한미반도체 영업본부장의 차세대 장비 설명을 듣고 자리를 떴습니다.
기자들은 이후 곽 회장을 붙잡고 삼성과 관계가 개선되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곽 회장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객사(삼성)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자주 뵙고 있다"라고 짧게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와 협력에 대해 "열려 있다. 이뤄지면 좋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곽 회장의 말은 짧았지만, 양측의 오랜 앙숙 관계를 비춰볼 때 짧은 말 뒤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시계를 지난 2011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한미반도체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장비 자회사 세크론(현 세메스)을 특허침해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당시 업계에서는 한미를 향해 삼성 계열사를 고소하다니 미친 짓이라고 수군댔습니다.
하지만 1년여의 법정 공방 끝에 승소한 건 한미반도체였습니다. 손해배상금은 21억 원으로 재판 청구액의 10% 수준에 불과했지만 상징적 의미는 컸습니다. '재벌도 특허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선례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삼성전자는 한미반도체와 거래를 끊고 오늘날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의 필수 장비가 된 열압착 장비 이른바, TC본더를 일본 신카와에서 들여와 썼습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당시 양사 관계에 대해 "한미가 삼성 공장 출입증조차 받기 어려웠다. 사실상 관계가 완전히 단절됐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와 손잡고 글로벌 HBM 시장을 평정했습니다. 삼성전자의 경쟁사 SK하이닉스는 한미반도체의 TC본더로 12단, 16단 HBM3E(5세대 HBM)를 양산하며 엔비디아의 독점 공급사로 자리매김하며 HBM 시장에서 완벽한 승자가 됐습니다.
반면 한미반도체와 거래를 끊었던 삼성전자는 일본의 신카와 장비로 원했던 수율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쟁사 제품 대비 떨어지는 장비 수준을 높이기 위해 자회사를 통해 내재화에 힘을 쏟았지만 한계는 분명했고 HBM 사업에서 뒤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삼성전자가 이제 한미반도체 앞에서 웃으며 악수를 청하고 있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SK하이닉스에 내준 글로벌 HBM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한미반도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는 내년부터 본격화될 HBM4 시장을 두고 경쟁사 SK하이닉스보다 한 세대 앞선 1c D램 공정을 적용해 반전을 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루빈'에 탑재될 핵심 부품으로 꼽히는 만큼, 삼성전자의 실적을 좌우할 제품의 완성도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과거 '버릴 수 있는 부품 공급사' 정도로 여겼던 한미반도체가 AI(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이제는 '없으면 안 되는 파트너'가 된 셈입니다. 검증된 한미반도체 장비를 도입하면 HBM 수율 개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한미반도체가 TC본더 납품을 두고 협의 중이라는 얘기가 파다합니다. 앞서 곽 회장의 "좋은 관계" 발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습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회사 ASML이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로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쥐락펴락하듯, 한미반도체 역시 TC본더로 삼성과 SK하이닉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슈퍼 을'의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올해 4월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으로부터 TC본더를 주문하자, 한미반도체가 파견 엔지니어를 전원 철수시킨 것도 대체 불가능한 기술력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평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SEDEX에서의 화기애애한 만남은 진짜 화해의 신호일까요. 업계의 시각은 엇갈립니다. 혼자 다 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반도체 시장 생태계 내 협력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낙관론자들의 평가와 그저 필요에 의한 계산된 악수일 뿐 삼성이 진짜 달라졌는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회의론자들의 평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결국 답은 내년에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HBM4 양산이 본격화되는 2026년 삼성전자가 한미반도체 장비로 얼마나 공격적으로 생산량을 늘리느냐가 관건입니다. 삼성이 한미반도체와 진정한 파트너십을 구축한다면, 단순히 두 회사의 화해를 넘어선 의미를 갖습니다.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갑을 관계에서 협력 관계로 변화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소송으로 삼성이 얻은 건 '자존심'이었지만, 잃은 건 'HBM 시장'이었습니다. 코엑스 전시장에서 본 화기애애한 인사가 진짜 화해의 시작인지, 아니면 전략적 계산의 결과물인지는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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