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벨리우스의 나라 핀란드, 어떻게 21세기 클래식 음악계 중심이 되었나?
SBS Biz
입력2018.12.04 16:30
수정2018.12.05 14:57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젊은 창업자나 새롭게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는 예술가들은 늘 어렵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정부의 지원이나 든든한 후원자가 있으면 큰 힘이 될것입니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는 많은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성공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를 지원했던 든든한 후원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술경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SBSCNBC 홍승찬의 클래식, 경제로 풀다)
◇ 살로넨부터 사라스테까지…핀란드, 클래식 음악계 중심으로 우뚝 서다
에사 페카 살로넨은 1958년, 핀란드에서 나고 자란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작곡가입니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있는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호른과 음악이론, 그리고 지휘와 작곡을 전공했고, 1979년 지휘자로 데뷔했습니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83년, 살로넨은 당시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기로 했던 마이클 틸슨 토마스의 대역으로 나서 말러의 교향곡 3번을 지휘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단번에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핀란드 방송교향악단과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그리고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거쳐 지금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지휘봉을 잡고 있습니다.
영국의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그의 저서 '거장신화'에서 1950년대 이후 출생한 지휘자들 가운데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이들로 사이먼 래들, 리카르도 샤이, 발레리 게르기예프,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명훈과 더불어 살로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작곡가로서도 지휘자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현악을 위한 LA 변주곡'과 '색소폰 협주곡' 등의 대표작이 있고, 방금 보신 광고의 배경음악도 살로넨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살로넨을 정점으로 해서 오늘날 핀란드 출신의 음악가, 특히 지휘자와 작곡가들의 활약은 전 세계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만한 수준입니다.
핀란드가 자랑하는 또 한 사람의 지휘자로 유카 페카 사라스테를 들수 있습니다. 살로넨보다 두 살 위인 그도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있습니다. 스물 세 살 때 헬싱키필하모닉에서 지휘를 시작한 사라스테는 1994년부터 2001년까지 토론토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2002년부터 2005년까지 BBC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를 맡았고, 2010/11시즌부터는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서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동 세대 지휘자들중 가장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으며 해가 갈수록 음악적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살로넨과 사라스테 두 사람 외에도 많은 핀란드 출신 음악가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미 스칸디나비아 여러 국가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지휘자 중 70% 정도가 핀란드 출신이라고 합니다.
◇ 북유럽의 소국 핀란드, 끊임없이 거장 배출하는 배경은?
북유럽의 작은 나라 핀란드가 이처럼 클래식 음악, 특히 지휘와 작곡 분야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할수 있게 된 이유를 꼽자면, 아마 핀란드 국민들의 각별한 음악 사랑이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정부의 정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핀란드는 인구 대비 정부의 예술 지원 예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단적인 예로, 핀란드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인 헬싱키 필하모닉과 핀란드 최고의 공연장 핀란디아홀 연주회 입장권은 전석이 15유로, 우리 돈으로 약 2만 원에 불과합니다. 경로 우대석은 10유로, 학생과 실업자는 5유로에 입장권을 살 수 있습니다. 로얄석 입장권이 십만 원을 훌쩍 넘는 우리나라와 비교해도 상당히 저렴한 금액입니다.
또한 1993년부터 시행된 '교향악단법'에 따라 전국의 모든 오케스트라 예산 가운데 25%를 국가가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각 지역의 시민과 음악 애호가들이 오케스트라를 결성한 뒤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소요 예산의 60% 이상을 확보했을 때 국가가 나서는 방식입니다.
덕분에 인구 500만의 이 작은 나라에 22개의 오케스트라가 있는가 하면, 전체 인구의 10%가량이 거주하는 수도 헬싱키에만 3개의 오케스트라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핀란드 사람들은 세계에서 연주회를 가장 자주 보러 가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핀란드인들은 오케스트라가 없는 도시는 도시가 아니라고 한답니다. 이런 환경에서 좋은 지휘자들이 길러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오케스트라마다 상주 작곡가를 두고 있어 재능과 역량을 갖춘 많은 작곡가들이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널리 알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실력과 경력을 차곡차곡 쌓은 지휘자와 작곡가들이 당당하게 세계 곳곳에 진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제2의 시벨리우스를 꿈꾸는 음악가들…막대한 지원 뒤에 숨은 부작용은?
핀란드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음악가로 아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가 있습니다. 그는 뉴욕타임즈가 시벨리우스 이후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말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1955년, 미국의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은 90회 생일을 맞은 시벨리우스에게, 그가 추천하는 핀란드 출신 젊은 작곡가의 미국 유학 비용을 전액 부담하겠다는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행운의 주인공이 바로 작곡가 아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였습니다. 그는 2016년 사망하기 전까지 미국 내 오케스트라들이 가장 자주 작품을 위촉하고 연주하는 작곡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심지어 미네소타에서는 그의 이름을 앞세운 라우타바라 음악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의 교향곡 7번 '빛의 천사'는 칸 클래식 음반상을 수상했고, '알렉시스 키비'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오페라 또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상당한 예산을 지원해 음악을 연주하며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면 뛰어난 음악가들이 더 많이 배출되는 것일까? 모든 일이 그렇듯이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책은 뿌리 없는 나무를 가꾸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핀란드는 1969년부터 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누구나 예술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했고, 핀란드 최고의 음악교육기관인 시벨리우스 음악원 역시 그 예산의 대부분을 정부가 부담하고 있습니다.
칼레비 아호는 요즘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핀란드 출신의 작곡가입니다. 그는 한때 시벨리우스 음악원 교수로 있었고 핀란드의 라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주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헬싱키에 살면서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곡가가 생계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에만 모든 힘을 쏟을 수 있는 건 핀란드의 예술가 연금제도 덕분입니다. 예술가가 역량과 업적을 인정받으면 일정 기간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등의 의무 조항이 없어 선정된 작곡가들은 아무런 제약없는 환경에서 작곡에만 몰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지만 핀란드 음악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시벨리우스 역시 32살 때부터 연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부터는 종신연금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생을 헬싱키 북쪽에 위치한 아르벤파 숲속에 칩거하며 생활했습니다. 심지어 핀란드 정부는 그 근처를 지나는 비행기의 항로까지 바꾸면서 그의 창작생활을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핀란드 정부는 시벨리우스가 계속해서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보여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가 종신연금을 받은 이후에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배부른 예술가보다 오히려 배고픈 예술가가 더 낫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한 번 이런 일을 겪었으니 제도를 바꿀 생각을 충분히 할 만한데 핀란드 정부는 지금까지도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연금제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폰메크 부인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차이콥스키를 지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핀란드를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것입니다.
(영상으로 보기 ☞ [클래식, 경제로 풀다] 예술가 리히테르, 일본 공연기획사를 구하다?…신뢰가 만든 ‘인연’)
구성 / 편집 : 최대건 (SBSCNBC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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