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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유아기 형성된 '性 판타지'..왜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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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14.01.27 16:15
수정2014.01.27 16:15

■ 슬라보예 지젝 특강 - 제1강 섹슈얼리티를 위하여

제가 또 다른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아주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카일 맥라클란이라는 주인공 남자가 옷장에 숨어서 또 다른 주인공인 데니스 호퍼와 이사벨라 로셀리니간의 정사를 지켜봅니다. 일반적인 정사에 대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흥미로운 상황이 연출됩니다. 정사 중에 호퍼가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숨이 찬거죠. 

프랑스에 '미셸시옹'이라는 영화 음향 이론가가 있습니다. 그가 이 장면을 기가막히게 해석했는데요. 아이가 부모의 모습을 상상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성행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아이에게 부모의 거친 숨소리는 아이에게 어려운 상상이죠. “아빠가 산소호흡기를 사용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겠죠. 엄밀히 말해 이러한 생각은 인간들의 유아기 성시기의 상상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유아기에 가졌던 성판타지를 잊고 평범하고 동물적인 성관계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에대해 라캉은 “진정한 성관계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을 판타지의 연결고리로 본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판타지가 유지되어야 성관계도 유지 될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들뤼지의 생각은 좀 더 복잡했는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유아기 성 판타지는 여러 행태의 도착을 가질 수 도 있고 변태적인 생각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오이디푸스'와 같은 어떤 장점의 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그래서 남녀간의 정상적인 성관계만 가능하고 그 외의 것은 다 변태이고 도착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프로이트적인 생각으로 비춰보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 형태가 가능하고 변형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즉, 정상적인 성관계에서 변형될 가능성이 많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형태의 도착과 변태적 또는 변형된 방식을 채우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무엇이 인간적이며 무엇이 변질되었는가 무엇이 변경되었는가. 우리는 단지 동물적 성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사이 판타지가 있는 성이 가진다는 겁니다. 인간은 성 안에서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성적 행위에 상대방이 있는 것이고 때문에 판타지가 있어야 성이 유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 속에 성적인 판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성적으로 느껴질 수 도 있습니다. 누군가 때리는 것도 성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뭔가 성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프로이트는 훨씬 더 정교한 주장을 합니다. 우리가 성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의 은유적인 배경은 우리는 읽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단순히 성만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성행위하는 상상을 하는 것이 '성'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행위와 동반된 여러 가지 판타지를 상상하는 것이죠. 모든 상상력이 동원된다는 겁니다. 

아주 오래전에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테른'이나 '슈피겔'이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 여름호에서 만화 시리즈를 봤습니다. 남자들에게 “이번 여름에 뭘 하시겠습니까”란 주제로 질문한 내용이었습니다. 한 남자는 정글을 여행하고 싶다, 다른 남자는 그리스 유물을 보러 가고 싶다, 세 번째 남자는 유명한 식당에서 고급음식을 먹고 싶다, 네 번째 남자는 그냥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싶다, 그렇게 각각 원하는 것들을 말하는 장면과 함께 만화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실제로 원하는 것은 항상 알몸의 여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점잖은 말을 하려 해도 머릿 속은 알몸의 여자를 상상하는 거죠. 라캉은 이러한 시각들을 훌륭하게 정리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공식적으로 천주교나 기독교가 문란한 성관계에 대해 반대한다는 겁니다. 정상적인 성관계만을 허용하는 것이죠.

알렌카 주판치치라는 여성학자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실제로 성관계에 대해 불편한 시각이 있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는 성관계가 불필요한 부수적인 요소라고 간주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상적으로 필요한 그림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들에 대해 굉장히 불편해 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상상력의 부산물이다. 이게 왜 상상력의 부산물이냐 하면 실제로 성인이 된 사람들을 보면 사실 그들의 삶도 완벽하지 않았다는 거죠. 기독교는 육체적 향유를 거부합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들이면서 은혜를 받길 원하죠”

그러한 측면에서 봤을 적에 우리는 바로 리비도(성충동)인 측면, 기독교에서 존재하는 성충동적인 측면을 부인함으로써 우리는 유아기 성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도 안되는 부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인 짝짓기 자체가 모순이다라는 겁니다. 단순히 성관계를 즐기는 것을 죄로 여기는 거죠. 그리고 성과 연결된 것을 살펴보면 최종적으로 성교가 중요한데 그것을 비난하고 있다는 거죠. 

미셸 푸코라는 철학자를 잘 아실겁니다. 그는 성에서 쾌락으로 넘어갈 때 다양한 쾌락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류입니다. 이미 기독교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 사조,피가학적 관계들, 그런 부정적인 것들처럼 다양한 형태의 도착적인 관행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성관계 대신 이런 것들이 더 만연되어 있다는 거죠.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가지입니다. 왜 기독교는 성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인가, 또 성을 유혹으로 보고 있는가. 리분석학적 입장에서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은 단순히 육체와 관련된 것만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다른 경쟁적인 형이상학적 내용들이 있습니다. 

라캉이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은 가장 형이상학적 요소입니다. 열정에 휩싸여 비자연적으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일상에서 벗어나서 사랑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매일 내가하는 일들을 놓게 되기 때문에 성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라캉이 여기서 두가지 설명을 해줍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성교를 한다는 거죠.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와 같은 성관계가 없기 때문에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류학적으로 유럽의 전통 인류학자, 철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나 다른 철학자들 또한 동물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동물들은 재앙이 있을 때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교미를 언제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조화롭게 사는데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본능적으로 못하고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자연은 조화로운 완전한 순환을 이루는데 인간은 뿌리가 뽑혀서 어떠한 상징적인 세상을 만들어야 되고 본능적인 부분인 아이를 낳는 것 또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어찌보면 인간이 자연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여기에 철학적인 질문을 또 해야 합니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아는 것이 자연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제라르 바이츠만이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채널에 대해 글을 썼는데 왜 우리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면서 좋아하는가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개미들이 어떻게 살고, 곰들은 어찌 사는지를 보며 우리가 즐거워하는데 동물의 세상은 정신없는 우리 사회와 비교해서 굉장히 잘 돌아가고 있거든요. 이 동물들은 주어진 질서에 따라 자기가 뭘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그 순리에 따라서 살고있는것을 즐기는 거죠.

이러한 자연의 조화를 교란시키는 것을 없애고 극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연 안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도착적이고 주인이 필요하고 조종당해야 되고 동물들은 조화롭게 살고 있다는 게 아니라 자연안에 있는 어떠한 혼란과 광기 즉  우리를 찾아야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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