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TV토론서 어떻게 닉슨을 이겼나
1960년 9월 26일은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존 F.케네디 상원의원과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 4번의 텔레비전 토론 중 첫번째 토론을 벌인 날이다.
미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이날 TV 토론은 당시 미 전체인구의 약 3분의 1인 7천만명 가량이 시청함으로써 현대의 정치 이벤트로서는 최대의 청중을 끌어모은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와 공화당의 존 매케인이 벌인 TV 토론의 시청자가 전체인구의 6분의 1인 5천200만명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케네디-닉슨 토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저녁시간에 TV 앞에 모인 시청자들에게 케네디 후보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유창한 언변으로 건장함과 자신감을 부각시킨 반면 닉슨 후보는 땀을 흘리고 말을 더듬는 등 허약한 이미지를 보여줬다.
케네디는 6주 뒤 열린 대선에서 초접전 끝에 승리해 미국의 최연소 대통령이 됐다.
미 주요 언론매체들은 현대적 정치토론의 효시로 평가되는 `케네디-닉슨 대토론(Great Debate) 5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집중조명했다.
ABC 방송과 사시주간지 `타임' 등에 따르면 케네디(당시 43) 후보는 토론개최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시카고의 힐튼 호텔 옥상에서 참모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면서 햇볕에 얼굴을 그을리고 있었다.
케네디의 핵심정책.연설 보좌관이었던 테드 소렌센(82)은 "모든 사람들은 케네디가 긴장하고 걱정했다고 말했지만 그는 낮잠(nap)을 자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방송 한시간 전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케네디가 (예상질문과 답변이 적힌) 메모들로 뒤덮인 채 자고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닉슨(47) 후보는 처음부터 불길했다.
무릎 수술로 12일간 병원신세를 진 후 식중독 원인균인 포도상구균 감염에서 회복되고 있을 때 토론 준비를 하게 됐다.
그는 호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측근들은 닉슨이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닉슨은 리허설도 거부했다.
그는 토론 설명자료를 끼고 돌았다.
역사학자 W.J.
로라바우는 이를 닉슨의 `전략적 실수'라고 지적했다.
토론 15분전 CBS 방송에 도착해 차에서 내릴 때 문짝에 다친 무릎을 부딪혔다.
당시 ABC 뉴스의 사장이었던 올리버 트레이즈는 "닉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고 그 순간을 회고했다.
케네디는 참신함으로 무장했으나 닉슨은 어딘가 지쳐보였다.
닉슨은 계속된 선거운동으로 체중이 9㎏ 이상 줄어 와이셔츠 칼라가 너무 커 보일 정도였다.
토론이 시작되자 두 후보의 이미지는 뚜렷이 대비됐다.
컬러 TV가 1953년 도입됐지만 대부분의 미국 가정에는 여전히 흑백 TV가 압도적이었다.
방송은 선명도를 높인 흑백 TV 카메라를 투입했다.
케네디는 구릿빛 얼굴로 건강함을 과시하면서 자신에 차고 거침없이 답변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줬지만 닉슨은 창백하고 근심어린 나약한 모습을 노출시켰다.
케네다와 닉슨 모두 뉴욕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을 거절했다.
닉슨은 남자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메이크업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케네디는 프로듀서와의 사전 제작회의에 참가했으며, 스튜디오 배경을 고려해 검은색 정장과 파란색 셔츠를 골라 입고, 앉아 있는 동안 피부가 보이지 않도록 긴 양말을 신는 등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그에 비해 닉슨은 사전 제작회의도 불참하고 외관이 좀 밝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조명등 아래 앉으라는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하는 등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통령토론위원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뉴턴 미나우(84)는 "토론은 생중계되므로 편집이 안 되고 후보들을 통제하기도 불가능하다.
이는 지금 전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토론대결에서도 케네디와 닉슨은 내용과 스타일에서 극과 극을 달렸다.
케네디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권리와 부강한 국가라는 대담한 비전으로 포화를 연 반면 닉슨은 부통령후보인 헬리 로지의 조언대로 케네디와의 합의 등 회유적 접근방식을 취했다.
로지는 닉슨에게 줄곧 `암살자(assassin)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해왔다.
역사가들은 이를 "치명적 실수였다"고 말한다.
닉슨이 거무스름해 보이는 수염을 가리기 위해 덧칠한 화장품 때문에 계속 땀을 흘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지는 등 불안한 기색을 보인 데 반해 케네디는 느긋한 표정으로 만면에 웃음을 띤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다.
토론 당일까지도 유권자들은 케네디가 젊고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 말고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반면 닉슨은 부통령을 두번이나 하고 1952년 `체커스 연설(Checkers Speech:닉슨이 부정 혐의를 해명하면서 딸이 체커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갖게 된 사연을 말한 데서 연유)과 1959년 니키타 흐루시초프 옛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벌인 `부엌 논쟁(누구네 체제가 더 좋은가') 등으로 지명도가 높았다.
미국이 처한 국내외 상황도 불안했다.
3년 전 소련(러시아)은 사상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했고 철강 생산량은 미국보다 많았다.
핵무기 경쟁이 시작됐으나 미 국내는 민권문제로 시끄러웠다.
두 후보는 비록 4살 차이밖에 안 났지만 언행이나 비전에서 하나 세대만큼이 차이가 나 보였다.
닉슨은 토론 내내 케네디만을 응시함으로써 시청자들과 거리감을 뒀으나 케네디는 카메라, 즉 국민을 정면으로 보고 얘기했다.
토론 다음날 케네디 선거유세장에 케네디의 나이와 종교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그에 대해 거의 몰랐던 민주당과 무당파 지지자들이 운집하고, 심지어 보수 성향의 주지사와 유권자들조차 케네디 지지 쪽으로 도는 등 파장은 엄청났다.
TV로 본 사람이나 라디오로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토론의 승리자는 케네디였던 것이다.
라디오로 들은 사람들은 닉슨이 말도 더듬지 않고 비교적 무난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렌센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닉슨은 (청중들이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라디오 상으론 이겼다"고 했다.
역사학자 로라바우는 "(미 정치역사상) 1960년 케네디-닉슨 토론만큼 중요한 게 없다.
이 토론은 미 국민들이 전에 알았던 후보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높은 경지의 민주주의를 보여준 순간이었다"고 호평했다.
ABC는 50년전 케네디-닉슨 토론이 케네디를 슈퍼스타(superstar)로 만든 반면 닉슨을 패자(loser)로 만들었다고 제목을 뽑았다.
시사주간 타임은 50년전 첫 TV 토론이 없었다면 케네디가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지금의 일반적 평가이지만 60분간 진행된 케네디-닉슨 간 토론대결은 정치선거운동, 텔레비전 미디어(영향력), 미국 정치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미디어 역사가 겸 노스이스턴 대학 부교수인 앨런 슈뢰더는 "케네디-닉슨 토론은 아주 극적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는 드문 역사적 사건들 중 하나다.
이 토론은 하룻밤에 (상황이) 바뀐 경우다"라고 말했다.
케네디-닉슨 토론의 질문자로 참여했던 샌더 배노커(82) 전 NBC 기자는 "(토론 후) 텔레비전은 완전 정치영역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은 그 자체가 지배력(dominating force)이었다"라고 말했다.
케네디-닉슨 토론 전만 해도 오락매체인 TV에서는 정치가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그 이후 TV 토론은 선거운동기간에 가장 뜨거운 대결의 장이 됐다.
이후 제럴드 포드(공화)와 지미 카터(민주)가 붙은 1976년이 될 때까지 미국에서 대선후보 토론은 열리지 않았다.
1968년과 1972년 공화당 후보로 나선 닉슨이 토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슈뢰더는 16년간 대선후보 토론이 없었던 것은 후보들이 토론의 영향력을 두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버지니아대 정치연구소의 정치분석가인 래리 사바토는 케네디-닉슨 토론후 후보들은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보여야 할지에 신경을 쓰게 됐다면서 "토론 전 대부분 미 국민들은 후보를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후보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판단하게 됐다.
이게 오늘날 선거운동에까지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소렌센은 토론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이 승리함으로써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소련에 군사적 대응을 해야 한다는 합참의장의 건의를 거부할 수 있었다면서 만일 강경파인 닉슨이었다면 군사대응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핵전쟁이 터져 아무도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렌센은 "케네디가 토론에서 승리한 것을 우리가 확실히 감사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미 인터넷 서비스업체 AOL의 정치웹사이트 `폴리틱스 데일리'의 칼럼니스트인 월터 샤피로는 케네디-닉슨 토론은 한 후보가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보이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비주얼 시대'로 이끌었다며 토론을 지켜본 1960년의 유권자들에게 유일한 문제는 닉슨이 말한 모든 것이 실제 닉슨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정반대였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소렌센은 대선후보 토론이 민주주의 제도의 기둥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유권자의 관심과 투표율을 높일 수는 있지만 2분30초 안에 질문에 답하고 4분의 마무리 발언으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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